[훈련영상] 신태용호는 지금 '비공개 그리고 비장'

2018-06-12 13:18:46.0

"게임은 포기할 때 끝난다"

스포츠계에서는 가장 유명한 그래서 가장 진부한 클리셰 중 하나입니다. 만화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물론 세상 그 어떤 종목도, 그 어떤 선수도 패배를 가정하고 그라운드에 들어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외로 승리보다 패배를 담보로 한 경기도 많습니다. 아니,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가 확실시 되는 경기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본선경기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2018 러시아월드컵, 우리나라의 본선 조별리그 스웨덴전 첫 경기까지 이제 남은 시간은 정확히 25일. 세상을 향해 높이 치켜 들었던 마이크와 스피커를 모두 내린 신태용호는 선수단 소집 불과 4일 만에 훈련장 문을 꽁꽁 걸어 잠갔습니다. 소집 나흘 째를 맞던 지난 24일, 축구협회 미디어 담당관은 취재진 전원에게 파주에 위치한 국가대표팀훈련장(NFC) 시설에 개방이 허락되는 취재허용 시간 2시간 이전에는 출입이 통제된다는 사실을 알렸고 예정된 스탠딩 인터뷰 시간 10분, 예정된 훈련시간 15분 이외의 모든 일정이 비공개로 진행될 것이라 전했습니다.

불과 이틀 전까지 좀처럼 살아나지 않던 '월드컵 열기'를 걱정하던 협회 관계자들이나 선수단은 물론 신태용 감독 본인까지도 이제는 정말 비상 전시체제에 돌입한 셈입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치러지는 두 차례의 평가전을 앞두고 있는 대표팀은 월드컵 본선에서 만나야 할 세 나라(스웨덴, 멕시코, 독일)에 대비한 전술을 준비하기도 전에 먼저 또 하나의 거대한 적과 싸우고 있습니다. 바로 '3패'라는 실망감입니다.

사실상 본선행을 70%이상 약속 받았던 몇몇 선원들이 출항 직전에 승선에 실패하면서 배는 시쳇말로 난파 직전의 좌초 위기를 겪고 있지만 수장인 신태용 감독은 어떻게든 이 배를 러시아까지 끌고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돌이켜보면 결국 그 힘든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지금까지 이 배를 월드컵 9회 연속 진출이라는 본선무대까지 끌고 온 것도 신태용 감독이었고요.
이미지2014년 대표팀 수석코치로 감독 대행직을 잠시 맡으며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팀 벤치에 앉은 지 4년.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려 온 시간은 이제 월드컵이라는 가장 큰 무대를 앞두고 있지만 신태용 감독이나 선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합니다. "월드컵 때면 3천만이 다 감독이 된다"는 말 한 마디에도 역풍을 맞지만 월드컵 때만이라도 매를 들지 않는 시어머니들마저 없다면 지금 한국 축구의 현실은 더 혹독한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누군가의 일갈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불과 사흘전 서울시청 광장에서 패션모델 부럽지 않은 자태를 뽐내던 선수들은 그 아우라가 누구것이었냐는 듯 마치 딴 사람처럼 눈빛을 바꾸고, 표정을 바꾸고, 자신들의 껍질 안으로 들어가 늘 봐 오던 '국가대표' 손흥민, 구자철, 기성용의 그 모습으로 되돌아 가 있었습니다. 훈련을 지휘하는 신태용 감독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어두웠으며, 26명 선수단 중 누군가는 짐을 싸야하는 3명의 마지막 탈락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선수들 사이에서는 짧게 공개된 훈련 중에도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나마 훈련장에 '생기'를 불어 넣고 있는 것은 많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것처럼 막내 이승우입니다. 플레이스타일이나 평소 성격이나 우리 축구가 그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 천재는 어느덧 소년의 티를 벗고 어른이 되어가고 있지만 생애 처음으로 성인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은 뒤 다시 '아이'의 자리를 자처했습니다. 훈련이 없는 시간 중에 홀로 방에 있는 것이 답답했는지 숙소 주변을 돌아다니며 취재진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미쳐 챙겨오지 못한 비품을 받으러 나오는 모습이 아직은 영락없는 앳띤 소년의 그것입니다.

"형들하고 얼른 친해져야죠. 다들 잘 해주세요" 무엇이든 배워야겠다는,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많이 듣고 싶다는 이승우의 대답에서 문득 다시 한 번 국가대표라는 이름의 무게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수년도 더 된 어느날 파주에서, 박지성이 쟁쟁한 선배들보다 한참 막내이던 시절, 그 무거운 대표팀 에이스의 무게를 짊어지고 파주에 들어와서도 훈련장에서는 언제나 행복하게 웃으며 공을 만지던 막내였던, 천진난만한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이미지PSV에서, 맨유에서 늘 숨막히는 생존경쟁을 해야했던 박지성에게 어쩌면 대표팀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자신이 어린 시절 전설처럼 보고자란 국가대표 형들을 만나, 대표팀이 보냈던 전설 같은 시간들을 형들에게 들으며, 축구선수로서 평생 꿈꿔왔던 태극마크를 달고, 90분 간 모든 것을 불사르는 그 시간이 어쩌면 축구선수로서는 가장 두근거리는 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말입니다. 지금의 이승우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잡아야 할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마지막으로 러시아 월드컵 본선을 준비하고 있는 26명의 최종 예비명단에 오른 신태용호의 선수들 모두에게 마찬가지이고요.

지난 24일 훈련 시작 전에 취재진들과 인터뷰에 나선 수비수 오반석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제 실력이 다른 선수들과 크게 차이가 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들 소속팀에서, 자기 위치에서 충분히 기량을 입증한 선수들이 지금 여기에 모여 있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저도 대표팀 동료들에게 더 신뢰를 얻기 위해 두 차례의 평가전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하고 입증해야 할 것도 많겠지만 팀 전술에 빨리 녹아들고, 전술에 맞는 제 역할을 찾는다면 자신은 충분이 있습니다."

오반석은 신태용호 출범 이후 예비명단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선수였습니다. 체격조건이나 탁월한 대인방어 능력이나 중앙 수비싸움에서의 존재감은 K리그 내에서는 수준급이지만 국가대표 평가전에도 한 번 발탁하지 않았던 선수였기에 그의 본선행 호출은 스무살 신예 이승우의 발탁 만큼이나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파주에 처음 소집돼 수많은 취재진 앞에 선 오반석은 떨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고, 그저 침착히 말했습니다. "저도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베테랑 공격수 이동국이 이런 말을 했었다죠. 축구선수 중에 월드컵, 국가대표를 꿈꾸지 않는 선수는 없다고요. 한국 축구선수 중에 "국가대표를 은퇴하겠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실제로 정말 몇 안 될 겁니다. 차두리조차 "내가 박지성이나 이영표도 아니고 국가대표는 본인이 은퇴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현역으로 뛰는 한 태극마크는 선수의 영원한 꿈입니다. 아무리 첫 발탁이었다 한들 아마도 오반석 역시 언제나 가슴 한 켠에는 축구선수로서 국가대표가 되는 그 날을 꿈꾸고 있었을 겁니다.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란 자신도 있었을 거고요.
이미지소집 3일 만에 문을 꽁꽁 닫고 모든 것을 비공개로 전환한 신태용호 훈련장을 15분 밖에 취재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상념이 들었던 것은 이제부터는 선수단의 눈빛이, 코칭스태프의 분위기가 정말로 '달라졌다'는 인상을 받아서 였습니다. 24일 인터뷰에 나선 박주호가 "밖에서는 다들 3패를 이야기하시지만 저희가 먼저 처져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 될 것 같거든요. (이)근호형이나, (염)기훈이형이 없어서 어떻게 하다보니 제가 제일 나이가 많은 고참이 되었는데 성용이나, 자철이를 그래서 더 많이 도와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어찌됐든 월드컵이 어떤 무대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무엇이든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할 생각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하늘에 별을 따는 것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아직은 32장에 불과한 월드컵 본선 티켓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 그것이 '어쩌다보니' 아시아에 무려 4.5장이나 배정이 되어 있다고는 해도, 그래도 아직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200개가 넘는 회원국들, 더욱이 실력이 비등비등한 아시아 대륙에서 최종예선을 통과하는 것은 매번 로또 추첨을 보는 것 만큼 가슴 떨리는 일이 됐습니다. 48개로 본선 참가국이 늘어나는 2022년 대회부터 월드컵 본선의 경쟁 구도와 판세가 어떻게 바뀔지 당장 알 수 없는 일이니 32개국 경쟁체제가 주는 월드컵의 '쫄깃함'을 리얼타임으로 즐길 수 있는 대회도 얼마 남지 않은 셈입니다.

러시아월드컵은 바로 그런 대회 중 하나이자 기성용, 손흥민, 구자철, 이청용, 황희찬, 이승우 같은 선수들이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대회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대회에 나오는 32개국 중 32번째인 나라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로 뭉치면 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신기한 팀이기도 합니다. 이번 월드컵 무대를 밟는 누군가가 제2의 이근호가, 제2의 이동국이, 제2의 박지성이 될 겁니다. 당신이 러시아월드컵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게임은 포기할 때 끝납니다. 신태용호의 월드컵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SBS스포츠 이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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